♣옥수수와의 인연
저는 동국대 농대에서 농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선배님의 권유로 미국유학을 꿈꾸면서 나름대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학을 위해서는 영어실력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학의 꿈을 잠시 접고, 첫 직장을 강원도 농촌진흥원에서 농업연구직 공무원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공무원은 지금처럼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 근무하면서 유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국의 대학에 입학을 허가 받기 위해서는 토플(TOEFL)시험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으로 토플시험에서 농촌진흥청에 전체 직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하와이에 있는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선발하는 미국 국비유학 장학생 시험에 응시하였습니다.
농촌진흥청 직장 상사들이 그 사실을 알고 저를 만류하였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고 헛수고 하지 말고 포기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저는 “두고 보십시오, 저는 꼭 합격할 자신이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저에게는 정말 큰 행운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하와이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4년간의 장학금 뿐 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눈물겨운 사연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일류대학을 나오지 못해 겪은 어려움은 매우 많았습니다.
♣힘들었던 유학생활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면서 옥수수를 전공하시는 브루베이커 (Dr. Brewbaker) 교수님을 지도교수님으로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 과목의 학점을 받는 것이 마치 전쟁을 치루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많이 준비했고 나름대로 잘 한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미국에 가서 강의실에 앉으니 강의 내용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학점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을 때 지도교수님께서 격려해 주시고 성원해주신데 대하여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의 말씀이 고맙게 생각납니다.
한국 한생들은 처음에는 영어 때문에 고생하는 데 조그만 지나면 잘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용기를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한국 학생 7명에게 박사 또는 석사학위를 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한국 학생들이 귀국하여 우리나라의 옥수수 연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나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소재하고 있는 국제열대농업연구소(IITA; International Institute of Tropical Agriculture)의 옥수수 연구원으로 근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교인 동국대에서 교수직을 제안 받아, 고심 끝에 변심하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옥수수 연구
동국대 교수직을 시작한지 2년 후인 1985년 봄 나이지리아에 있는 국제열대농업연구소(IITA)에 2년 계약으로 옥수수 연구원으로 해외 출장을 갈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린아이들 셋과 아내와 함께 미지의 땅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지금이야 나이지리아가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인지, 또 축구도 잘하는 나라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당시는 아프리카 하면 마치 식인종이 있다는 오해도 있었던 때라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러한 생각은 모두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생활수준은 낮지만 있을 것 다 있고,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한 것을 알았고, 그 곳의 부자들은 우리보다 더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2년 동안 옥수수 연구에 대하여 많이 배우고 경험했으며 훗날 귀국해서 옥수수를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던 기초를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지리아 주변의 몇몇 이웃 나라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한국을 오가는 휴가 길에 유럽과 동남아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옥수수 밭에서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흑인이라서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하는데 몇 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일 년이 지난 후에는 그 사람들과 정이 들어 정말 친하게 지냈습니다. 지금도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곳이라 생각됩니다.
♣북한 방문기
2002년 겨울 북한과의 옥수수 협력 사업을 위하여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행이 모두 8명 이였는데 생전 처음으로 북녘 땅을 밟는다는 설렘으로 중국에서 북한 비자를 받아 고려항공으로 북한에 도착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교과서에서 배운 북의 주체사상이나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신격화가 예상보다 더 심한 것 같았습니다. 순안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바로 김일성 동상에 꽃다발을 받치러 갔습니다. 그래야만 그곳에 있는 동안에 일이 순탄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온 시가지에 김씨일가에 대한 충성심 강한 찬양문구가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위하여 어디론가 미니버스를 타고 가는데 온 시내에는 불빛이 몇 개 없고 암흑천지였습니다. 호텔에서 밖을 내다보니 맞은편에 20여 층의 건물이 있는데 불빛이 하나도 없어 함께 머무는 분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대화가 도청되고 있다고 교육을 받았으니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면서 “왜 맞은편 건물에는 불 켜진 방이 하나도 없을까요?” 라고 말했더니 그 다음날 저녁에는 그 건물의 절반의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농업과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옥수수 관련 회의를 한 후에 농업과학원의 시설을 보여 달라고 하였더니 수리 중이라 불가능 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수리 중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이라도 보여 달라고 했으나 전혀 안되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남조선에서 단옥수수 육종가라고 했더니 다음에 올 때는 단옥수수 원종을 가져오라고 요청하기에 고려해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는 관광지만 구경하고 농업시설은 전혀 보여주지 않아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사진촬영이 금지되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평양에서 차를 타고 묘향산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해외에서 받은 선물과 기념품을 보관하고 있는 국제 친선 관람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십만 개의 기념품을 산속의 거대한 지하시설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꽤 값나가는 것들도 있는 것 같아 내가 안내원에게 이것들을 해외에 팔면 돈이 되어 국가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바로 김씨일가에 대한 모독죄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안내원의 표정이 달라지면 정색을 하고 화를 내면서 나를 질책했습니다. 내가 엄청난 말실수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안내원이 마음이 좋아서 그대로 넘어갔지 잘못하면 수용소 행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며칠 후에 노래방이 있다기에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우리를 노래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노래곡목이 80% 이상은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이였고, 북한 노래는 몇 곡 되지 않았습니다. 노래방에는 도우미도 있어 우리를 도와주었는데, 그 노래방은 누구를 위한 노래방인지 인수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갈 곳은 없고 답답하여 안내원에게 아침 산책을 부탁했더니 일행 8명을 한 줄로 세우고 안내원 한 명은 맨 앞에 서고 또 한 명은 맨 뒤에 서고 도보로 시내를 산책하였다 내가 저쪽으로 가보자고 하니 안 된다고 하고 정해진 길만 가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안내원에게 지하철을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눈을 부릅뜨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하기에 왜 안 되냐고 물으니 당에서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에다 신청해 보라고 했더니 화를 내면서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매일 저녁 식사자리에서 졸랐더니 하루는 여러분 당에서 허락이 났으니 내일 지하철을 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일행 모두 가 기대를 하고 지하철 정류장으로 가서 에스컬레이터가 3대가 있는데 가운데에 타게 하고 주민들과 접촉을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지하 80m에 있다고 안내원이 설명하는데 우리의 에스컬레이터와 달라 한 번에 내려가는 것이라서 매우 길게 느껴졌습니다. 맨 뒤에서 기다리게 하는데 잠시 후에 우리나라의 버스 크기만 한 4량의 지하철이 들어오는데 맨 뒤의 차가 빈차로 왔는데 우리를 거기로 타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아무나 지하철은 태워주지 못하고 당에서 허가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태우기 위해서 빈차가 와야 되는 나라이구나. 부흥역에서 출발하여 매우 느린 속도로 영광역에 도착하니 모두 내리라고 하기에 더 가자고 떼를 쓰니 1역만 허가가 났다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찌 되었던 그래도 지하철은 타 볼 수 있었으니 당에 감사해야 하겠지요. 일주일간의 체류 후에 한국에 도착하니 내 생전 처음으로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